청소년기가 끝나갈 무렵, 잠들기 전 문득 생각이 나서 적어봅니다. 뻘글이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아직 반백 년도 안 산 놈이 무슨 인생 타령이냐 하시겠지만, 제 스스로 자아를 인지하고 의식의 존재를 자각하게 된 그 시점부터 지금까지 약 10년. 저에겐 꽤 길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짧은 세월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이 감정을 잊고 싶지 않고,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어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기록해 봅니다.
아직 반백 년도 안 산 놈이 무슨 인생 타령이냐 하시겠지만, 제 스스로 자아를 인지하고 의식의 존재를 자각하게 된 그 시점부터 지금까지 약 10년. 저에겐 꽤 길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짧은 세월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이 감정을 잊고 싶지 않고,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어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기록해 봅니다.
먼저, 저희 집은 가난한 편은 아닙니다. 비록 어머니 한 분만 경제 활동을 하시지만 굶어본 적은 없었고, 지방이긴 해도 자가에 자차도 있으니 객관적으로는 못사는 편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정말 맞더라고요. 분명 살 만한 형편이었음에도, 20대를 눈앞에 둔 지금 되돌아보면 참 (다른 의미로) 가난했구나 하고 느낍니다.
아래의 지난 10년간의 흐름 속에서, 이런 환경이 한 사람의 정체성을 어떻게 구축해 나가는지 드러납니다.
저는 유치원 때까지는 지어진 지 30년 된 구축 아파트 단지에서 살았습니다. 편의 인프라라고는 저 멀리 있고, 밤이 되면 깜깜해져 비행 청소년들이 배회하는 그런 동네였습니다. 그때는 아직 자아를 깊게 인식하지 못해서 불평등이나 어려움 같은 건 하나도 느끼지 못한 채 행복하게 그저 친구들과 뛰어놀며 지냈습니다.
그러다 집에 여윳돈이 조금 생겨, 구축 단지 앞 대로변을 건너면 나오는 조금 더 환경이 나은 동네로 이사를 갔습니다. 옛 동네가 그립기도 하고 새로운 곳에 대한 설렘도 컸죠. 이 동네 역시 소득 수준이 비슷한 아파트들만 모여 있어서,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까지도 딱히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격차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저 매일 놀기에 바빴으니까요.
그러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배정을 통해 몇 블록 떨어진 꽤 잘사는 지역의 중학교로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제가 사는 집이 4억 조금 넘는데, 그 중학교 근처 일대의 집값은 다 20억이 넘었고, 더 잘사는 동네에서 온 아이들의 집값은 30억도 가뿐히 넘었습니다. 재산이 거의 5배에서 8배까지 차이가 났던 거죠. 물론 초등학생 티를 아직 벗지 못한 중학교 1학년 때까지는 학업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큰 '격차'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놀기에 바빴거든요.
변화의 계기는 중학교 2학년 무렵, 할아버지의 투병 소식과 임종을 겪으면서 찾아왔습니다. 스스로를 깊이 되돌아보게 된 것이죠. 그전까지는 놀기만 하느라 자기 객관화, 즉 메타인지 능력이 현저하게 발달하지 못해 저 스스로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조차 몰랐습니다.
그렇게 객관화가 시작되니 비로소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극심한 학업 역량의 차이였고, 그때부터 뒤늦게 공부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학교 수준이 워낙 높았고(단순히 시 수준이 아니라 전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명문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누적된 학습 공백은 쉽사리 메꿔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다들 잘사는 동네다 보니 온갖 과외와 명망 있는 학원들의 사교육, 선행학습의 위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학교 수업조차 선행을 가정하고 일부 생략하면서, 혹은 선행하지 않은 학생이라면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진도를 빨리 나갔거든요. 이렇게 아이들의 교육에 투입되는 압도적인 자원과 제 본연의 역량 부족이 맞물려 낮은 성적을 낳았습니다.
성적이 낮다는 객관적 사실 그 자체는 아쉽긴 했어도 썩 고통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진짜 고통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그 일대가 경제 중심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일종의 핵심 학군지이다 보니, 성적으로 형성되는 서열화와 계급화가 아이들 간의 배척, 혐오, 멸시를 부추겼습니다. 공부를 못했던 저는 자연스레 그 폭력의 피해자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잘난 아이들, 소위 인싸들끼리 어울리고 못난 놈은 도태당하는, 그야말로 '사바나' 같았습니다.
학창 시절, 그것도 자아 정체성이 막 형성되는 그 예민한 사춘기 시기에 친한 친구의 장난이 아닌, 순수한 멸시와 조롱이 담긴 별로 친하지도 않은 아이에게 "병신아"라는 소리를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저는 "야, 이것도 못하냐", "어휴 병신", "쟤는 못 해", "어휴 빡대가리야", "니가 뭘 한다고..." 같은 말들을 매일같이 들었습니다. 친한 친구들은 안 그랬지만, 반에서 소위 공부 잘하고 집에 돈 많고 잘나가는 애들이 저를 매일같이 조롱하고 멸시했습니다. 남자애들에게는 광대 내지 폐급 취급을 받았고, 여자애들은 아예 상대를 안 하려 했죠. 수행평가가 있을 때면 아이들은 저와의 조별 활동을 대놓고 꺼렸습니다.
사교육도 못 받고 역량도 부족한 제가 어떻게 단기간에 성적을 올리겠습니까. 아이들이 면전에 대고 욕을 해도, 저는 그저 멍청한 사람처럼 허허 웃으며 넘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학교 때 하도 이런 핍박과 괴롭힘을 당하다 보니, 지금도 누군가 제 곁에서 손을 머리 위로 휙 들기만 해도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으며 움츠러드는 트라우마가 생겨버렸습니다.
공부 이야기만 누가 꺼내도 곧바로 대답도 못 할 정도로 "그냥 나는 멍청해" 라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게 되고요.
공부 이야기만 누가 꺼내도 곧바로 대답도 못 할 정도로 "그냥 나는 멍청해" 라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게 되고요.
밖에서 치이는 동안, 가정에서도 저는 그다지 편안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저와 다르게 공부를 상당히 잘하셨고 문과의 전성기 시절 법대를 나오신 분이었습니다. 공부를 뺀 일상에서의 아버지는 참 다정하고 따뜻하셨습니다. 사이도 좋았고 대화도 많이 나누었죠. 하지만 20세기를 살아오신 아버지는 21세기의 '자본주의적 교육 환경'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셨습니다. 모두가 사교육을 받는 지금은 예전처럼 혼자 힘만으로 판을 뒤집기가 무척이나 어려운데도, 아버지는 몇몇 특이 케이스들을 들먹이며 저를 이해하지 못하셨습니다.
공부와 관련되기만 하면 끝없는 구박과 잔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사교육을 받지 않았기에 아버지가 몇몇 과목을 매일 몇 시간씩 직접 봐주셨는데, 그때마다 "왜 이리 공부를 못하느냐", "야 이 돌대가리야", "멍청아", "어휴 씨..." 등 고막이 찢어질 듯한 고함과 모진 타박을 견뎌야 했습니다. 학교에서의 멸시와 집안에서의 구박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여 지낸 셈입니다. 남자는 울면 안 된다고들 하지만, 매일은 아니더라도 매주 울었습니다. 부모님 앞에서도 울고, 뒤에서도 몰래 울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요. 하지만 아무도 이 힘듦과 아픔을 알아주지 않더라고요. 말로 입는 상처가 어쩌면 세상에서 제일 아플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때 뼈저리게 확인했습니다.
그렇게 공부와 관련된 온갖 모진 말들을 듣다 보니 저절로 사교육을 간절히 원하고 바라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돈'이 눈에 보이더군요. 중3 무렵, 드디어 수학 학원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한 달에 30만 원. 그것도 부촌인 중학교 일대가 아니라, 제가 살던 동네의 학원이었습니다. 중학교 근처는 주 3일, 1~~2시간 수업에 최소 50만 원이 넘어갔거든요.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다녔던 예체능 학원(매일 1~~2시간)의 원비도, 사실은 부모님이 학원 측과 가격을 흥정해서 깎은 금액이었다는 걸 중학교 입학 무렵에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엔 그게 참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그때부터 이미 경제적으로 약간 위축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원하던 수학 학원을 다니게 되었고, 제 손으로 직접 부모님 카드를 결제하며 한두 번은 잘 다녔습니다. 그런데 카드가 오래되어 마그네틱이 잘 읽히지 않아 결제가 안 되는 일이 몇 번 발생했습니다. 결제를 시도하는 원장 선생님과의 그 어색한 침묵, 그리고 시선. 그 순간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제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학원을 그만둘 명분이 없었기에 그 불편한 감정을 억누르며 다녔고, 마침 같이 다니던 친구가 그만두자 저도 냉큼 "혼자서 고민하며 수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핑계를 대며 도망치듯 학원을 나왔습니다.
그때는 제가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정확히 몰랐습니다. 그저 그 숨 막히는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만 싶었죠.
그렇게 간신히 턱걸이로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머리가 좀 더 크면서 집안 사정을 더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평생 집안의 경제 활동을 어머니 혼자 책임지셨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고, 중학교 때부터 짐작만 하던 아버지의 불편하신 몸 상태에 대해서도 자세한 내막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내막을 알게 되었을 때, 마음이 너무 아팠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동시에 '아, 우리 집의 경제적 수준이 정말 밑바닥이구나' 하는 비참한 감정마저 느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저는 제 몸 하나 간수하기도 벅찼기에 더 깊은 생각까지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고등학교는 여러 지역 출신 아이들이 섞여 있다 보니 잘사는 집 아이들이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게다가 다들 공부 좀 못한다고 면전에 대고 대놓고 욕을 하지는 않으니, 돌이켜보면 2년 반 동안 참 무난하고 평화롭게 잘 지냈습니다.
그러다 문득 오늘, 지나온 삶을 찬찬히 떠올려 보니 중학교 시절이 왜 그토록 견디기 힘들었는지 이제야 슬슬 알 것 같습니다. 집안의 극심한 경제 수준 차이, 교육의 불평등, 학교와 가정에서 들었던 모진 말들, 그리고 그 상처를 보듬어주지 못했던 환경. 특히 당시에는 학업 역량의 격차가 제일 뼈아픈 줄 알았는데, 되돌아보니 그냥 '우리 집 형편이 내가 속한 집단에 비해 한참 부족하다'는 사실이 제 내면에 거대한 열등감을 심어주었던 것입니다.
아이들은 BMW, 벤츠를 타고 등교했고, 사복을 입을 땐 남자애들은 톰브라운, 나이키 한정판, 비싼 명품, 300만원짜리 명품 시계나 최소 스마트워치를 찼으며, 여자애들은 구찌 백에 명품 귀걸이를 했습니다. 하나같이 비싼 애플 풀옵션 기기들을 사용했고요. 한 반에 부모님이 의사이거나 사업가인 친구들이 과반이 넘었습니다. 부모님이 돈이 많으니 아이들은 아이돌 굿즈를 사고 공연을 보러 다니며 돈을 펑펑 쓰는 그 애들 앞에서 저는 위축되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부터 모아오던 돈을 중학교 때 더욱 악착같이 모았고, 그 결과 지금은 나름 아반떼 한 대쯤은 거뜬히 뽑을 정도의 금액을 모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험들을 거치며 형성된 내면의 그늘 때문인지, 백화점처럼 반짝거리는 곳에 가길 참 좋아했던 8살의 소년은 19살이 된 지금, 꽤 큰돈을 수중에 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번듯한 가게나 백화점 문을 들어설 때조차 흠칫 주춤하게 되었습니다. 가족끼리 백화점으로 외식을 하러 가서도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어 서둘러 밥만 먹고 도망치듯 금방 나오고 싶어지게 되어버렸네요. 무언가 돈을 써야할 것만 같은 그런 기분, 그 기분으로 불편해고 불안해지고 누가 당장이라도 뭐라할 것만 같은 기분.
돈을 모아도, 친한 친구들끼리 어딜 놀러가도 선듯 돈 쓰기가 망설여지는 이 문제..
사소한 것들이 쌓여 사람의 경험을 만들고, 그 경험이 인격과 정체성을 만드네요.
돈을 모아도, 친한 친구들끼리 어딜 놀러가도 선듯 돈 쓰기가 망설여지는 이 문제..
사소한 것들이 쌓여 사람의 경험을 만들고, 그 경험이 인격과 정체성을 만드네요.
이 트라우마가 남은 70~80년의 인생 동안 과연 고쳐질 수 있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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