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가 공존하는 곳



여기가 상계동 정확히는 상계 4동 부근입니다. 제가 4살때 이사를 와서 늙어 죽을 곳이기도 한 곳인데 요즘 제가 사는 곳 주변을 사진으로 남기려 여기저기 사진에 담고 있습니다.
뉴타운 지구로 거의 20년 정도 묶여 70~2022현재의 모습이 공존하는 정말 독특한 곳이고 곧 철거 예정이라 이런 풍경들 조차 없어질 운명이니 사진이나 영상을 취미로 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강력 추천 드립니다.
8,90년 영화를 찍어도 완벽하리 만큼 잘 보존된 곳이 한곳 두곳이 아니고(심지어 50년은 족히 묵었을 간판도) 좁은 골목골목 조차 아직 다 살아 있습니다.
지나고 보니 처하고 보니 또 이 모든게 다 사라진다니 아쉬워서 가끔 올려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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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0개
팔십년말 구십년대초에 구로공단 아가씨를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때가 썸이었나 봅니다.
같이 자연농원 가서 바이킹도 타고 그랬었는데…
그 때 밤 늦게 데려다 주던 골목길에 가로등 하나 핀 조명처럼 비추고 오래된 블록 담장에 박힌 작은 창문틈으로 형광등 불빛이 새어 나왔더랬죠.
대표적인 건, 종로 피맛골을 갈아엎은 것이죠.
그 외에도 서대문 형무소 주변 무악동(독립운동가 가족들이 옥바라지를 하려 모이던...)도,
고 박원순 시장이 지키려 했지만.. 지금은 그것도 여의치 않고...
보기 싫고, 불편하다고 해도, 조금은 남겨둘 수 없는 것인지...
이런 것도 역사의 한 부분일텐데..
그넘의 아파트..
바꿔 생각해 보면, 청와대 주변이라 개발을 하지 못했지만,
깔끔하게 유지한 덕에 지금은 관광명소가 된 세칭 "북촌"일대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드는 생각이 이곳 모두가 철거되면 아마 나는 늙었다 라는 생각으로 살지는 않을 까 합니다. 기억의 70%가 사라지니 말이죠.
사진속 동네는 하천부지(정부소유) 위에 집을 짓고 사는 바람에 무허가 건물이고 그래서 양성화가 힘들었던 겁니다. 만일 불하(국가로부터 토지를 사는 행위)가능 했다면 평당 2.500만원 이상 가는 땅들이죠. 그렇다고 정부도 함부로 집을 부시지는 못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미 사람이 집을 짓고 10년 이상(실제 30년 이상) 산 집들이라 생존권을 보장받아 정부땅이라고 함부로 철거를 하기가 법적으로 불가.
지금은 너무 많이 바뀌어 잘 알아보지 못하겠지만...
그 당시에는 강가건너(개천 이었는지?-의정부 가는 대로쪽으로) 삼양식품(삼양라면) 공장이 있어서 그 공장에 다니는 형님들과 함께 하숙을 하였댔습니다. 저녁이면 라면땅 등 과자를 가져오면 맛나게 얻어 먹었던 기억이 새삼 깨어납니다.
당시의 동네 풍경들이 눈앞에 다가온듯합니다.
참 그당시 골목마다 요꼬공장(쉐타짜는 공장)이 상당히 많았댔습니다.
당시에는 먹고 사는 문제가 모든 일상의 최우선이었던 시절이어서 월례행사 처럼 여러 사람들이 추렴하여 담백질을 섭취하였던 아주 힘겹고 암울한 시절이 떠올라 절로 눈시울이 붉게 물들고 마는군요.
한 1년 정도 상계동에서 지내다가 용산구 후암동(34번종점-70년대 기준) 윗동네 해방촌으로 옮겨 용산고에 입학을하여 야간에 요꼬공장에서 24시가 넘도록 일을하며 지내던 참으로 힘들고 고달팠던 기억이 이 사진 몇 장으로 주마등처럼 흐르는군요.
아마도 자판에 손을 떼는 순간 하염없는 눈물이 앞을 가릴것 같습니다.
암튼 @묵공 님의 사진으로 많은 시간 여행을하며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그거 아시나 모르겠네요. 요꼬공장 가내수공업 일이 많았는데 요꼬 바늘 허리인가 끝인가에 실로 매듭을 짓는 일? 아버지 공장이 망해서 우리 삼형제 그거 정말 많이 했습니다.ㅎㅎㅎ
우리집은 국수공장이었습니다. 기억으로는 한 3년인가 5년인가를 운영했던 기억인데 지금도 나이드신 분들이 국수공장 둘째라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죠. 아버지가 대박사업이라고 중고 국수기계를 사오셔서 시작했는데 기계에 반죽을 넣고 실처럼 나오는 국수발이 잘라지면 그걸 얇은 대나무 막대기로 중앙을 채어 마당가득 걸어 말리는데 가난한 사람들의 겨울 나기가 쉽지가 않은 시대여서 인근의 주민들과 뒷쪽 달동네 주민들이 약속을 하고 국수를 가져가면 아버지는 어디 메모도 하지 않으시고 "갚지 않으면 내 망한다?" 이 말만 반복하시더니 결국 망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도 제 아버지는 국수 외상값을 수금하지 않아셨어요. 멋있고 다정한 분이셨는데 왜 그렇게 그때는 무서웠나 모르겠습니다. 당시 아버지들 근엄 컨셉? 그 컨셉의 표상이셨어요.ㅎㅎㅎㅎㅎ
이런일은 주로 요꼬공장(내수용만 - 수출용은 마무리를 하지않고 원공장에 납품을 하면 그 공장에서 마무리를 함)의 시다들이 주로 하는 일이었는데..., 일감이 넘치면 부업처럼 가정에서 받아다가 마무리 작업을 하여 납품하면 1쪽당 얼마씩 받는 식이었습니다.
상계동 지역에는 내수품은 많이 없고 주로 수출용 공장에서 원사를 받아다가 견본대로 짜서 납품하는 공장(가내 수공업)이 주류를 이루었답니다.
제가 있던 집은 저희 고향의 어떤 아저씨가 서울 공장에 취직을 시켜준다는 누님의 말을 듣고 동네 여자(주로 연상인 누나)들 사이에 끼어 상경을 하게 되었답니다.
전체 공순이들이 10명 정도에 유일한 남자인 제가 사장이 원청에 일감 받으러 가고 자리를 비우면 기계 고장나고 하면 제 손을 거쳐야 하는 일들이 다반사 였습니다.
후에 남자들도 몇 명 들어와서 사장 맏딸과 눈이 맞아 연애하다가 결혼도 하는 일이 기억 납니다. ㅎㅎ
[http://sir.kr/data/editor/2208/17dffa4e1a62e4c1b6b895c5236563e4_1660478698_0568.jpeg]
기억을 더듬다 보니 그 요꼬 끝도 기억나고 매듭까지 기억이 납니다. 저 매듭이 절대 풀리지 않는 매듭이라 살면서 간혹 쓰고도 살죠. 당시 한참 요꼬 매듭 수공업 일들을 동네 아주머니들이 하시더니 스웨터 실밥 정돈하고 뒷 손 보는 일들을 가져 오시더라구요.
상계동은 산과 골목이 많았고 당시만 하더라도 자유연애는 뭔가 모르게 쉬쉬 하는 분위기라 해가 뉘었뉘었 지는 초저녁 외딴 골목이면 누나 형들이 짝을 이루는 경우도 많았고 동네 수동식 펌프에 줄이 길어 산기슭 약수터만 가도 누나 형 들이 쭈뼛쭈뼛 서로 남인양 다른 방향을 보고는 했었습니다.ㅎㅎㅎㅎ
물지게, 얼음장사, 공중변소, 푸른천에 하얀 돌기 바닥인 축구화 등등, 덕분에 생각지도 않게 많고 좋은 기억들 더듬어 봤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