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itter Gim

시월의 마지막 문턱에서 그리움마저 늙어간다

시월의 마지막 문턱에 서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이용의 '잊혀진 계절'

젊은 날에는 그저 사랑과 이별을 노래하는 가요인 줄 알았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듣기도 했고, 지나간 인연을 떠올리며 마음 한구석이 아려 오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참 묘한 일이다.
노래는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인데, 듣는 사람의 마음은 세월을 따라 이렇게도 달라진다.
어느덧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긴 세월을 살아온 것 같은데, 막상 지나온 날들을 헤아려 보면 엊그제 일처럼 생생한 순간들이 적지 않다.
청춘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고,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과 부딪치며 살아온 날들이 있었다.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앞만 보고 달리던 시절도 있었다. 그때는 시간이 그렇게 빨리 흘러갈 줄 몰랐다.
내게도 언젠가 일흔이라는 나이가 찾아오리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가슴으로는 느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젊은 날의 시월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계절이었다.
중년의 시월은 살아온 길을 돌아보는 계절이었다.
그리고 이제, 일흔을 바라보는 시월은 사람과 세월의 소중함을 조용히 헤아리는 계절이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오래된 노래를 들으면 그 노래를 함께 듣던 사람들이 먼저 떠오른다.
한때는 언제라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던 친구들,
세상 어디에선가 잘 살아가고 있으리라 믿었던 사람들,
그리고 이제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얼굴들.

세월이 흐른다는 것은 단순히 나이를 먹는 일이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는 세상의 한 부분이 조금씩 사라져 가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하나둘 빈자리가 생기고 나서야 함께했던 평범한 날들이 얼마나 귀한 시간이었는지 알게 된다.

그 시절에는 몰랐다.
함께 밥을 먹고, 시답잖은 농담을 나누고, 별다른 용건 없이 안부를 묻던 일이 그렇게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줄은.

이제는 그리운 사람의 얼굴보다 그 사람과 함께했던 풍경이 더 선명할 때가 있다.
그날의 하늘빛, 골목길의 모습, 낡은 찻집의 분위기, 그리고 그 속에서 웃고 있던 젊은 나의 모습까지.

생각해 보면 그리운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그 사람과 함께 존재했던 세상,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의 공기마저 그리운 것이다.

그렇다고 지나온 삶이 온통 아름답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후회스러운 일도 있었고, 지우고 싶은 기억도 있다.
조금 더 너그러웠더라면 좋았을 일, 한 번쯤 먼저 손을 내밀었더라면 좋았을 인연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인생이란 모든 것을 제대로 해내는 일이 아니라,
부족하고 서툰 자신을 데리고 끝까지 살아가는 일이라는 것을.

젊은 날에는 뭔가를 바꾸고 싶었고, 중년에는 내 삶을 지키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저 하루하루가 무탈하고, 곁에 있는 사람들이 평안하며,
가끔은 오래된 노래 한 곡에 마음이 따뜻해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흔을 바라본다고 해서 마음까지 일흔이 되지는 않아야 할 텐데...
여전히 가을바람에 마음이 흔들리고,
오래된 노래에 가슴이 먹먹해지며,
문득 떠오르는 얼굴 하나에 한참 동안 생각이 머물기도 한다.
몸은 세월을 따라 늙어가지만, 마음속 어딘가에는 아직도 젊은 날의 내가 살고 있는 모양이다.

시월의 마지막 밤 문턱에서 나는 잠시 그 시절의 나를 만나보려 한다.
꿈이 많았던 젊은 나에게,
삶의 무게를 견디던 중년의 나에게,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계절을 건너온 나 자신에게 조용히 말을 건넨다.
참 많은 일이 있었구나.
참 많은 사람을 만났고, 참 많은 시간을 보내왔구나.
그리고 여기까지 오느라 참 애썼구나.

이제 와 생각하니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이 반드시 젊은 날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힘겨운 가운데서도 가족을 지키던 날들이 있었고, 누군가에게 작은 힘이 되어 주었던 순간도 있었다.
별다른 일 없이 하루를 마치고 편안히 잠들 수 있었던 날들 역시 소중한 삶의 한 부분이었다.

어쩌면 행복이란 그렇게 대단한 모습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살아 있는 동안 서로의 곁을 지켜 주고, 가끔은 웃으며 안부를 나누고, 계절이 바뀌는 것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것.
그것이면 충분했을지도 모르겠다.

시월의 마지막 밤.
이제는 떠나간 사람을 붙잡고 싶지도 않고, 흘러간 세월을 되돌릴 수도 없다.
다만 그 모든 인연과 시간이 내 삶에 머물렀다는 사실이 고마울 뿐이다.
그리고 아직 내게 남아 있는 계절이 있다는 것도 고맙다.

내년 시월에도 이 노래를 들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때도 오늘처럼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그리운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불러 보고, 여전히 가을을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

젊은 날에는 잊지 못할 사람이 있어 이 노래를 들었지만, 이제는 잊고 싶지 않은 세월이 있어 이 노래를 듣는다.

시월의 마지막 밤,
그리운 사람은 마음에 담아 두고, 오늘은 그동안 소홀했던 사람과 저녁 약속 하나쯤 잡아 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그리움도 세월 따라 나이를 먹는가 보다.
오래된 노래 한 곡에 다시 따뜻해지는 마음만은 아직 늙지 않은 모양이다.

---

시월의 마지막 문턱에서 다시 듣는 노래

이용 — 잊혀진 계절

그 시절의 그리움을 노래로 다시 만나봅니다.  : 2026-10-26일 KBS 방영 영상

- 💫Glitter G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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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개

젊었을 때 등산복, 장비에 나침판까지 챙겼는데 산 입구에서 맴돌다가 내려오던 느낌 ㅎ
약수터에서 본 그여자는 잘 잇나 ㅋ
ㅎ 산 오르는 것보다 산에서 마주친 인연이 더 오래 기억에 남았던 시절, 주마등처럼 만들어집니다.

나침반까지 챙겼어도 사람 마음으로 가는 길은 찾기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ㅎ
그 약수터의 그분도 어디선가 그 시절을 떠올리고 있을지 모르지요.

세월이 지나도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도 살아온 날들이 남겨 준 추억 아니겠습니까. ^^

Glitter Gim 님, 글을 천천히 읽었습니다.
읽는 동안 저도 잠시 걸음을 멈췄습니다.
 

늦가을 숲길에서는 마른 잎 밟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지요. 글을 읽는 동안 마음이 그런 길을 걷는 듯했습니다.
한동안 잊고 지내던 이름들이 떠올랐고, 그 곁에 서 있던 옛날의 제 모습도 보였습니다.
 

먼저 건너오신 계절을 저도 조금 뒤에서 지나고 있습니다. 오래된 노래를 듣다가 문득 말이 없어지는 마음을, 이제는 저도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사람 하나가 그립다는 것이 그 사람과 함께 살았던 세상까지 그리워하는 일이라는 말씀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이런 저녁에는 따뜻한 차 한 잔을 사이에 두고 나눴던 이들과 그 때의 이야기들이 더욱 그립습니다.

말이 끊기면 잠시 창밖을 바라보며 
무슨 좋은 말을 찾아내려고 애쓰지 않아도 
그 자체만으로도 편안하고 좋았던 그런 자리 말입니다.
 

내년 시월에도 이곳에서 안부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Glitter Gim 님이 이렇게 마음을 적어 주신 덕에
저도 제 안의 그리운 이름들을 한 번 더 불러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화면 너머로
이런 마음을 나누고 안부를 건넬 수 있다는 것이 고맙습니다.

 

11월의 첫걸음에,
Xbuilder 님의 계절 속으로 이끌려 잠시 머물러 봅니다.

저의 시월 이야기가 Xbuilder 님의 지나온 계절에도 잠시 닿았던 모양입니다.
특히 무슨 좋은 말을 찾아내려고 애쓰지 않아도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 편안했던 자리 라는 말씀에 한동안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 삶에서 참으로 귀했던 순간들은 어쩌면 그런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특별한 말도, 대단한 일도 없었지만 서로의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시절 말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리운 것은 떠나간 사람만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웃고 이야기하던 그때의 우리 자신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이제는 앞서고 뒤서고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마다 다른 길을 걸어왔어도 오래된 노래 한 곡에 마음이 머물고,
지나온 세월을 서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좋은 인연이지요.

내년 시월에도 이곳에서 안부를 나누면 좋겠습니다라는 말씀이 참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그때까지 우리 모두 무탈하게, 아직 남아 있는 계절들을 아끼며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어제의 그리움을 함께 나눠 주셔서 고맙습니다.
시월은 그렇게 저물었지만,
오늘부터 시작되는 십일월에도 우리 가슴만은 따뜻했으면 합니다.

Xbuilder 님,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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