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희와 '주변 남자들' ... 정보
기타 김현희와 '주변 남자들' ...본문
▲ 19일 낮 서울 연희동 전두환씨 집 앞에서 KAL기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골목시위가 열린다.
사진은 지난해 9월 25일 국회앞에서 열린 KAL기 사건 전면재조사를 위한 국회청원 기자회견.
---------------------------------------------------------------------------
김현희와 '주변 남자들'... 즐겁던 그들, 지금은 무섭다?
KAL가족회 관계자들은 잠적한 김현희씨를 찾아낼 것을 요구할 정치인 명단을 작성하고 있다. 과거 김현희씨의 체포, 수사, 재판, 사면과 관련해 일정한 역할을 맡았던 인물들이 그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그 중 핵심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 전두환
KAL858기 사건이 발생했던 1987년 당시 최고권력자. 그 해 4월 13일 호헌발표를 했다가 직선제를 요구하는 국민적 저항에 부닥치자 한때 계엄령 선포를 고려하는 등 배수진을 치다가 미국의 압력 등에 밀려 결국은 자신의 의지를 꺾어야 했다. 민주화 열기를 등에 업은 민간정부에 권력을 넘겨줄 경우 자칫하면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에 빠져 있었다. 공교롭게도 정권 마지막 해인 1987년 초에는 수지김 사건이, 말에는 김현희 사건이 발생했다.
● 노태우
KAL858기 사건이 발생한 덕분에 손쉽게 대통령에 당선된 인물. 바레인에서 생포된 김현희가 절묘하게도 투표일 하루 전날인 1987년 12월 15일 김포공항을 통해 압송되면서 대통령 선거는 이미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다음날 모든 신문은 큼지막한 활자로 '노태우 대통령 당선' 소식을 전하기에 바빴다. 대통령 당선의 '일등공신'에 대한 특별배려(?)였을까. 노태우 정부는 1990년 4월 12일 사형수 김현희에게 특별사면이라는 선물을 안겨줬다.
● 정형근
자신이 김현희 수사를 담당, 관리했다고 자처하는 인물. "KAL기 사건 조작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친북 주사파"라는 발언 때문에 KAL기 사건 희생자의 가족들에게 가장 큰 원한을 사고 있다. 지난 7월 9일에는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고영구 국정원장에게 소설 <배후>가 KAL기 사건 조작설을 제기하는 것에 대한 대응책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 소설의 작가인 서현우씨는 이 소식을 듣고 7월 22일 각 언론사에 공개질의서와 보도자료를 돌렸으나, 통일뉴스를 제외하고 어떤 언론도 다루어주지 않았다.
● 이회창
대법원이 1990년 3월 27일 김현희에게 최종적으로 사형선고를 확정할 당시 4명의 대법관 중 한 명. 당시 재판에는 배석, 이회창, 김상원, 김주한 등 4명의 대법관이 참여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이 사건의 수사는 거의 전적으로 김현희의 자백과 진술에 의존한 것이다. 실제로 비행기 폭파로 희생됐다는 피해자들의 사체나 유품 하나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선진국의 법정이었다면 피고인의 자백만으로 이 엄청난 사건의 전모를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고 사형선고를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다.
● 최병렬
노태우 정부의 김현희 특별사면을 발표했던 당사자. 노태우 정부의 공보처장관으로 정부 대변인을 겸직했던 최병렬 현 한나라당 대표는 사형선고가 내려진 지 보름밖에 지나지 않은 1990년 4월 12일 김현희에 대한 특별사면을 발표하며 "김양이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있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대열에 동참시키는 사면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 바 있다. 당시 그는 "김현희는 이 범행사건에 투입된 한낱 꼭두각시에 불과할 뿐 실질적인 주범은 김일성 부자"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115명의 대한민국 국민을 죽였다고 자백한 김현희에겐 관용을 베풀자고 호소했던 최 대표였지만 대한민국 국민을 단 한 명도 죽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친다'고 고백한 송두율 교수에 대해서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사진은 지난해 9월 25일 국회앞에서 열린 KAL기 사건 전면재조사를 위한 국회청원 기자회견.
---------------------------------------------------------------------------
김현희와 '주변 남자들'... 즐겁던 그들, 지금은 무섭다?
KAL가족회 관계자들은 잠적한 김현희씨를 찾아낼 것을 요구할 정치인 명단을 작성하고 있다. 과거 김현희씨의 체포, 수사, 재판, 사면과 관련해 일정한 역할을 맡았던 인물들이 그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그 중 핵심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 전두환
KAL858기 사건이 발생했던 1987년 당시 최고권력자. 그 해 4월 13일 호헌발표를 했다가 직선제를 요구하는 국민적 저항에 부닥치자 한때 계엄령 선포를 고려하는 등 배수진을 치다가 미국의 압력 등에 밀려 결국은 자신의 의지를 꺾어야 했다. 민주화 열기를 등에 업은 민간정부에 권력을 넘겨줄 경우 자칫하면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에 빠져 있었다. 공교롭게도 정권 마지막 해인 1987년 초에는 수지김 사건이, 말에는 김현희 사건이 발생했다.
● 노태우
KAL858기 사건이 발생한 덕분에 손쉽게 대통령에 당선된 인물. 바레인에서 생포된 김현희가 절묘하게도 투표일 하루 전날인 1987년 12월 15일 김포공항을 통해 압송되면서 대통령 선거는 이미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다음날 모든 신문은 큼지막한 활자로 '노태우 대통령 당선' 소식을 전하기에 바빴다. 대통령 당선의 '일등공신'에 대한 특별배려(?)였을까. 노태우 정부는 1990년 4월 12일 사형수 김현희에게 특별사면이라는 선물을 안겨줬다.
● 정형근
자신이 김현희 수사를 담당, 관리했다고 자처하는 인물. "KAL기 사건 조작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친북 주사파"라는 발언 때문에 KAL기 사건 희생자의 가족들에게 가장 큰 원한을 사고 있다. 지난 7월 9일에는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고영구 국정원장에게 소설 <배후>가 KAL기 사건 조작설을 제기하는 것에 대한 대응책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 소설의 작가인 서현우씨는 이 소식을 듣고 7월 22일 각 언론사에 공개질의서와 보도자료를 돌렸으나, 통일뉴스를 제외하고 어떤 언론도 다루어주지 않았다.
● 이회창
대법원이 1990년 3월 27일 김현희에게 최종적으로 사형선고를 확정할 당시 4명의 대법관 중 한 명. 당시 재판에는 배석, 이회창, 김상원, 김주한 등 4명의 대법관이 참여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이 사건의 수사는 거의 전적으로 김현희의 자백과 진술에 의존한 것이다. 실제로 비행기 폭파로 희생됐다는 피해자들의 사체나 유품 하나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선진국의 법정이었다면 피고인의 자백만으로 이 엄청난 사건의 전모를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고 사형선고를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다.
● 최병렬
노태우 정부의 김현희 특별사면을 발표했던 당사자. 노태우 정부의 공보처장관으로 정부 대변인을 겸직했던 최병렬 현 한나라당 대표는 사형선고가 내려진 지 보름밖에 지나지 않은 1990년 4월 12일 김현희에 대한 특별사면을 발표하며 "김양이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있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대열에 동참시키는 사면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 바 있다. 당시 그는 "김현희는 이 범행사건에 투입된 한낱 꼭두각시에 불과할 뿐 실질적인 주범은 김일성 부자"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115명의 대한민국 국민을 죽였다고 자백한 김현희에겐 관용을 베풀자고 호소했던 최 대표였지만 대한민국 국민을 단 한 명도 죽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친다'고 고백한 송두율 교수에 대해서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추천
0
0
댓글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