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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8년에 애완견을?? 티치아노-우르비노의 비너스 정보

1538년에 애완견을?? 티치아노-우르비노의 비너스

본문

venus

Venus of Urbino[1538년]
Titian
1538
Oil on canvas
119 x 165 cm
Uffizi, Florence

하얀 융단 위에 벌거벗은 여인이 비스듬히 누워 있고 여인의 발끝 쪽에는 개가 한 마리 웅크린 채 자고 있다. 화면의 구석에는 두 명의 하녀가 있는데 한 하녀는 무릎을 꿇고 옷장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다. 주인공인 여인은 사실 신화 속의 비너스가 아닌 베네치아의 한 귀족으로, 몸치장을 하려고 기다리는 모습이다.

티치아노 <Vecellio,  Tiziano>(1488?~1576.8.27)     

여러 도시에 초대되어 많은 귀족과 왕후를 위한 작품 제작에 참여하여 수많은 걸작을 남겼다. 또한 베네치아파 회화의 정점에 올라섰던 그는 자신의 후기 작품과 함께 이미 바로크 초기의 전환점을 이루었다. 만년에는 천재적 면모를 보이며 왕후와 같은 생활을 영위했다.

ticciano.jpg이탈리아의 화가. 북이탈리아의 피에베 디 카도레 출생.
베네치아에 전해진 플랑드르의 유채화법을 계승하여 피렌체파의 조각적인 형태주의에 대해 베네치아파의 회화적인 색채주의를 확립하고, 생애의 마지막까지 왕성한 제작활동을 하였다. 9세 때 베네치아로 나와 모자이크장인(匠人) 주카토의 문하에 들어갔다가 얼마 후 젠틸레 벨리니에게 사사하고, 다시 그 동생인 조반니 벨리니의 문인이 되었으며, 동문인 조르조네에게도 배웠다.

 기록에 남은 최초의 제작은 1508년 조르조네의 조수로서 독일인의 상관(商館) 폰다코 디테데스키에 그린 벽화이다. 그 이전의 ‘알려져 있지 않은 티치아노’의 기간이 너무 오래되어, 최근에는 그의 생년을 1488~90년으로 추정하는 설이 유력하다.

초기 작풍은 조반니 벨리니와 조르조네의 기법을 따랐으며, 피티화랑의 《합주(合奏)》 등은 조르조네의 작품인지 티치아노의 작품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지만, 유명한 《성애(聖愛)와 속애(俗愛)》(로마 보르게미술관 소장)에서는 이미 그 특유의 사실적인 묘사의 견실함과 명쾌한 색채를 보여주었으며, 1518년 완성된 베네치아 프라리성당의 제단화 《성모승천》에서는 선배들의 영향을 벗어나 자유로운 동적 표현으로의 진로를 보였다.

또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에 있는 《비너스의 예찬》 《주신(酒神) 축제》를 비롯하여, 23년의 《바커스와 아리아드네》(런던 내셔널갤러리) 등 일련의 고전신화 그림, 드레스덴회화관의 《공전(貢錢)》, 루브르미술관의 《장갑을 쥔 사나이》 등은 구도의 동적 리듬에 한층 진보가 보이며, 색채도 명도(明度)를 더해서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다. 이렇게 확고한 기반을 닦은 그는 국내외의 여러 왕후들로부터 위촉받아 더욱 명성을 떨쳤으며, 그 중에서도 독일황제 카를 5세를 위해 그린 33년의 《개를 데리고 있는 입상》(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은 그의 초상화 중의 걸작이다.

당시의 《마리아의 참배》(베네치아 아카데미아미술관) 《파르도의 비너스》(루브르미술관) 《우르비노의 비너스》(우피치미술관) 등은 풍속화적·풍경화적인 요소가 두드러지며, 인간성에 중점을 둔 독특한 작풍을 보여준다. 또한 풍만한 나부(裸婦)의 표현도 주요한 모티프를 이루며, 40년대에는 《큐피드와 비너스》(우피치미술관) 《음악가와 비너스》(프라도미술관) 《다나에》(나폴리국립미술관) 《거울을 보는 비너스》(워싱턴국립미술관) 《유로파의 겁탈》 등 독자적 관능성을 발휘하였다.

45년에는 로마 교황 바오로 3세의 초빙으로 《교황 바오로 3세와 측근자》(나폴리국립미술관)를, 48년에는 카를 5세의 초빙으로 《카를 5세의 기마상》(프라도미술관)을 그려, 원숙한 기법을 보여주었다.
또한 카를 5세의 아들 펠리페 2세의 많은 초상과, 《프랑수아 1세의 초상》(루브르미술관) 《리미날디의 초상》(피티미술관), 그 밖의 몇 점의 자화상 등, 그 성격묘사의 예리함은 그의 투철한 사실성의 깊이를 말해준다.

 만년에도 왕성한 제작욕을 보여 《형관(刑冠)》(뮌헨미술관)과 같이 격정적인 장면을 즐겨 그렸으며, 필치는 더욱 강해져서 마침내 그의 예술은 단려한 고전적 양식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격정적인 바로크 양식의 선구로서 17세기의 P.루벤스, H.렘브란트로 이어지는 길을 개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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