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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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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계림 독립투사 아나키스트 김지강 金芝江(본명: 김성수 金聖壽 1900 ~1969)과 함께 한 차일혁, China, 1936

Photographer Unidentified

차일혁기념사업회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실제 모델

 

차일혁은 전북 김제군 금산면 성계리에서 태어나 1935년, 즉 16세 때에 홍성공업전수학교에 입학했다. 평탄하게 학업을 계속했으면 그는 기술을 익혀 식민지 치하에서 밥 벌어 먹고살 수 있었지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 그의 운명(運命)을 틀어버렸다.

홍성공고 2학년 때 그는 조선인 선생을 구타한 일본인 형사를 두들겨 패버렸다. 큰일 날 짓을 한 것이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한창 극악했을 때, 일본인 형사를 구타했으니 더 이상 국내에서는 살 수 없었다. 차일혁은 결국 중국행을 택했는데 거기서 만난 사람이 지강(芝江) 김성수(金聖壽·1900~1969) 선생이다.

 

차일혁(車一赫, 차갑수(호적상 이름), 차용철(족보상 이름), 차철, 1920년 8월 20일(음력 7월 7일) ~ 1958년 8월 9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대한민국의 경찰관이다.

1938년부터 1943년까지는 조선의용대에서 팔로군과 함께 항일 유격활동을 했고, 해방 이후에는 유격대를 조직해 북한의 인민군과 교전 중 경찰관으로 채용되어 빨치산 토벌대 대장으로 참전했다. 그의 부대는 빨치산 이현상 일파를 사살, 또는 체포하였다. 그는 사살된 이현상의 시신을 직접 화장하여 뿌려주었다 한다.

그는 전북 김제군 금산면 성계리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건너가 중앙군관학교 황포분교 정치과를 졸업한 뒤 항일전을 위해 1938년부터 1943년까지 조선의용대에 들어가 팔로군과 함께 항일유격전 활동을 펼쳤다.

해방 후 귀국하여 유격대를 결성해 북한의 인민군과 싸우던 중 경찰에 특채되어 빨치산 토벌대 대장으로 복무하였다. 6.25전쟁 중에는 빨치산 소탕을 담당하는 전투경찰대 제2연대연대장으로 근무하며 조선 공산당 총사령관인 이현상 등을 토벌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가급적 귀순을 유도하여 많은 빨치산의 목숨을 살렸다.

70명의 결사대원으로 2천여 명의 적을 격파하였고,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도 사살하였다. 그러나 차일혁은 “이 싸움은 어쩔 수 없이 하지만 후에 세월이 가면 다 밝혀질 것이다.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벌어진 부질없는 동족상잔이었다고.”라는 글을 전북일보에 기고하였다.

그는 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을 화장하여 하동 송림에 뿌리며 장례를 치러주었는데, 이로 인해 상부로부터 질책을 받아서 부대원들에게 태극무공훈장이 3개나 수여되었지만, 차일혁은 받지 못하였다.

1951년 5월, 전라북도에 새로 주둔한 8사단(당시 사단장 최영희 준장)과 군경합동 회의 참석차 차일혁은 도계로 갔다. 회의에는 지리산 전투경찰대 사령관 신상묵을 비롯한 경찰 지휘관들과 최영희 사단장 및 8사단 참모들이 참석했다. 회의 후 따로 모인 전투경찰대 지휘관들은 화엄사 소각 명령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이 명령은 숲이 우거질 시기인 녹음기에 빨치산들이 근거지가 될만한 사찰 및 암자를 소각하라는 것이었다. 화엄사 소재 지역은 8사단 방득윤 대대장이 관할하고 있었고, 명령도 방득윤 대대장에게 내려진 것이었다. 그러나 방득윤 대대장은 명령 수행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고, 이를 알게 된 차일혁 18대대장은 방득윤 대대장에게 해결책을 제안했다.

화엄사 대웅전 등의 문짝을 떼어내어 문짝만 소각하는 것이었다. 차일혁은 명령을 "공비들의 은신처를 없애고 관측과 사격을 용이하게 하자는 것"으로 이해했고, 문짝만 뜯어내어 소각해도 그 목적은 충분히 달성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방득윤 대대장도 이에 동의했고, 이로써 화엄사는 전체 사찰이 소각될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천은사, 쌍계사, 선운사 등 유명한 사찰 등 문화재들에 대한 폭격도 될 수 있는 대로 피했다. 결국 그는 잇따른 명령 불이행으로 감봉처분을 받았다.

1954년 충주경찰서 서장으로 발령을 받은 그는 충주직업소년학원을 설립하여 중학교 진학을 못하는 불우청소년들에게 학업기회를 제공하였다.

조선의용대는 팔로군과 함께 항일유격전을 펼쳤던 독립운동단체로, 지리산 인근에서 빨치산 토벌시에 공산주의자들에게 온정적이었다는 이유로 진해경찰서장으로 재직시 좌익 혐의로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차일혁 경무관은 이후 공주경찰서장으로 좌천된 후, 1958년 금강의 곰나루에서 가족과 함께 물놀이를 하다가 38세의 나이에 타계하였다.[4] 자살하였다는 설도 있다.

1958년 조계종 초대 종정 효봉으로부터 감사장을 수여받았다. 1998년 화엄사는 화엄사 경내에 그를 기리는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1990년 그의 아들은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를 출간하였다.

 

원문

https://ko.wikipedia.org/wiki/%EC%B0%A8%EC%9D%BC%ED%9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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