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천왕봉에 올라 난 알게 되었다. 산 위에도 바다가 있다는 것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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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에 올라 난 알게 되었다 | |
대책없는 나의 지리산 사랑, 그 사랑에 대한 거리두기 |
▲ 구름 사이로 햇살이 통과하더니 그 아래 또 구름이다. 구름은 산을 휘감고 산은 사람을 감싸고 있다. |
ⓒ2004 박상규 |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언제나 내게 묻는다. "지리산에 뭐 묻어놨어?", "거기에 애인이라도 사는 거야?" 나는 매번 되풀이되는 사람들의 질문이 지겹지만, 사람들은 매번 지리산으로 향하는 내게 "지겹지도 않느냐?"고 묻는다.
▲ 노고단의 갈대는 차가운 새벽 바람에도 춥지 않은 듯 살랑거렸다. |
ⓒ2004 박상규 |
'저기 산이 있어 오른다'는 진부한 말은 하고 싶지 않다. 내 초라한 산행 경력은 그런 말조차도 하기엔 민망한 수준이다. 어떤 대상을 사랑하는데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건 종종 답답함을 불러온다. 지리산을 생각할 때면 가끔 답답함이 느껴지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 갈내 건너편에 산이 있더니 어느새 파도가 되어 일렁거린다. |
ⓒ2004 박상규 |
처음엔 지리산의 높고 넓은 품이 좋았다. 20살의 나는 '이 산을 내가 정복했다'는 조금 과장된 생각을 하며 기뻐했다. 그리고 지리산의 밤하늘에서 눈부시게 반짝이는 별빛을 좋아했고, 그 별빛을 무척이나 좋아하던 한 사람을 사랑하기도 했다.
▲ 벽소령의 구절초는 안개와 구름을 머금고 거대한 산줄기와 마주보고 있었다. |
ⓒ2004 박상규 |
좀 더 높은 곳에 올라 멀리 내다보기를 즐겨하던 나는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시선을 돌려, 아래와 옆을 보기 시작했다. 그 때 비로소 구절초와 쑥부쟁이가 보였고, 동자꽃과 원추리를 알게 되었다.
지리산을 수년 동안 오르내리고 나서야 내가 걸었던 산길에 야생화가 피고, 우직한 바람이 불어오며, 산새의 맑은 울음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작지만 소중하고, 하찮지만 아름다운 존재가 내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알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 구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지리산 천왕봉. 구름 속에서 감춤과 드러냄을 반복했다. |
ⓒ2004 박상규 |
나이에는 'ㄴ'이 붙기 시작했고, 머리털은 빠지고 빠져 이마는 광활해졌으며, 비대해진 뱃살은 계속 앞으로 전진하고 있다는 것. 이렇듯 외적인 변화는 명확하건만 내적으로 이룬 성숙에 대해서는 말할 게 없다. 나는 여전히 지리산을 모르고, 그 산이 주는 은근한 깨우침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아둔하다.
▲ 초가을 단풍이 물든 산길을 홀로 걷는 사람. |
ⓒ2004 박상규 |
이젠 내 등산화에도 설악의 낙엽을, 소백의 풀잎을, 덕유의 이슬을 느낄 기회를 주고 싶다. 타자를 통해 우회적으로 돌아서 다가가는 방법. 그 방법이 아둔한 나에게 더 큰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해줄지도 모른다.
▲ 천왕봉에 올라 알게 되었다. 산 위에도 바다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
ⓒ2004 박상규 |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 존재가 부담스럽지 않게 사랑하는 미덕. 절정의 끝에 지독한 힘겨움이 있더라도 거침없이 달려가는 거룩함. 얼만큼의 시간이 흘러야 나는 그 미덕과 거룩함을 배울 수 있을까.
▲ 새벽이 밝아오면 우직한 반야봉도 눈을 뜬다. |
ⓒ2004 박상규 |
지리산을 여러 차례 오르내렸는데 그 모습 모르고만 다녔다. 이 골 저 골 이 등성이 저 등성이 많이 더투고 헤집고 돌아다녀도 그 산은 저를 보여주지 않았다. 함께 잠자며 뒹굴며 살 섞어 땀흘려보아도 거듭 알 수 없었다. 어느 해 겨울 기진맥진 청학이골 내려와서 강 건너 남쪽 보았더니 크낙한 산줄기 또 하나 무겁게 버티고 있었다. 이듬해 겨울 한달음에 그 남쪽 산 올랐더니 비로소 옆으로 누운 지리산 긴 몸둥어리 한꺼번에 보이더라. 빛나는 큰 보석 병풍 펼쳐져서 내 그리움 달려가 북받치게 하더라. 사랑하는 것들 떨어져 바라보아야 더 잘 보이느니.
-이성부, <보석>
▲ 지리산은 가을의 절정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간다. 그 절정의 끝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달려간다. |
ⓒ2004 박상규 |
▲ 어느새 쑥부쟁이는 시들고 구름은 산 사이로 요동치고 있다. 곧 저 쑥부쟁이 위로 흰눈이 수북이 쌓일 것이다. |
ⓒ2004 박상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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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개
멋집니다.
사진 작가이신듯..........멋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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