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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에 올라 난 알게 되었다
산 위에도 바다가 있다는 것을

대책없는 나의 지리산 사랑, 그 사랑에 대한 거리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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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름 사이로 햇살이 통과하더니 그 아래 또 구름이다. 구름은 산을 휘감고 산은 사람을 감싸고 있다.
ⓒ2004 박상규
말없이 배낭을 꾸릴 때면 엄마는 더 이상 어디를 가느냐고 묻지 않으신다. 소풍 앞둔 초등학생 마냥 허둥대며 내 덩치 만한 배낭을 메고 떠나는 내 발걸음의 정착지가 어딘지 엄마는 잘 알고 계신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언제나 내게 묻는다. "지리산에 뭐 묻어놨어?", "거기에 애인이라도 사는 거야?" 나는 매번 되풀이되는 사람들의 질문이 지겹지만, 사람들은 매번 지리산으로 향하는 내게 "지겹지도 않느냐?"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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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고단의 갈대는 차가운 새벽 바람에도 춥지 않은 듯 살랑거렸다.
ⓒ2004 박상규
지리산에 처음 올랐던 20살 시절부터 10년이 훌쩍 지나버린 지금까지 난 매번 쏟아지는 사람들의 질문에 단 한 번도 적절한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가끔 "지리산에 내려온 선녀 옷을 훔쳐 왔는데 그 옷 갖다주려고. 그래야 선녀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지"라는 우스갯소리가 그나마 성실하게 대답한 축에 속한다.

'저기 산이 있어 오른다'는 진부한 말은 하고 싶지 않다. 내 초라한 산행 경력은 그런 말조차도 하기엔 민망한 수준이다. 어떤 대상을 사랑하는데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건 종종 답답함을 불러온다. 지리산을 생각할 때면 가끔 답답함이 느껴지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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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내 건너편에 산이 있더니 어느새 파도가 되어 일렁거린다.
ⓒ2004 박상규
지리산 언저리에 처음 발자국을 새긴 건 재수를 하던 94년 여름의 일이다. 그 때부터 지리산은 내게로 왔다. 나는 그 산이 저 아래 남쪽에 변함없이 자리잡고 있는 것에 고마워하며 오르고 또 올랐다.

처음엔 지리산의 높고 넓은 품이 좋았다. 20살의 나는 '이 산을 내가 정복했다'는 조금 과장된 생각을 하며 기뻐했다. 그리고 지리산의 밤하늘에서 눈부시게 반짝이는 별빛을 좋아했고, 그 별빛을 무척이나 좋아하던 한 사람을 사랑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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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소령의 구절초는 안개와 구름을 머금고 거대한 산줄기와 마주보고 있었다.
ⓒ2004 박상규
태풍이 몰아쳐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지리산에 몰래 혼자 기어들기도 했고, 해 떨어져 어두운 지리산에서 몇 시간 동안 공포에 떨며 헤매기도 했다. 그날 밤 어렵게 찾아든 지리산 장터목산장에는 산장지기 외에 아무도 없었다. 넓은 산장에 홀로 누워 듣던 비바람에 흐느끼는 지리산의 울림은 여전히 내 가슴을 떨리게 한다.

좀 더 높은 곳에 올라 멀리 내다보기를 즐겨하던 나는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시선을 돌려, 아래와 옆을 보기 시작했다. 그 때 비로소 구절초와 쑥부쟁이가 보였고, 동자꽃과 원추리를 알게 되었다.

지리산을 수년 동안 오르내리고 나서야 내가 걸었던 산길에 야생화가 피고, 우직한 바람이 불어오며, 산새의 맑은 울음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작지만 소중하고, 하찮지만 아름다운 존재가 내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알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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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지리산 천왕봉. 구름 속에서 감춤과 드러냄을 반복했다.
ⓒ2004 박상규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지만 지리산에서 10년 부대낀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가끔 내가 개만도 못한 게 아닐까를 의심해 보기도 한다. 10년 동안 난 뭐가 어떻게 변했던 것일까?

나이에는 'ㄴ'이 붙기 시작했고, 머리털은 빠지고 빠져 이마는 광활해졌으며, 비대해진 뱃살은 계속 앞으로 전진하고 있다는 것. 이렇듯 외적인 변화는 명확하건만 내적으로 이룬 성숙에 대해서는 말할 게 없다. 나는 여전히 지리산을 모르고, 그 산이 주는 은근한 깨우침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아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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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가을 단풍이 물든 산길을 홀로 걷는 사람.
ⓒ2004 박상규
이번 추석 지리산에서 내려오며 이젠 지리산에 대한 욕심을 좀 버리는 게 어떨까 생각해봤다. 대신 다른 산을 통해서 지리산을 곱씹어 보자는, 다른 방식의 이해와 사랑을 통해 더 크고 넓은 지리를 느껴보자는 소망을 품어봤다. 그렇다고 다시는 지리산으로 향하지 않겠다는 지키지 못할 말을 하는 건 아니다.

이젠 내 등산화에도 설악의 낙엽을, 소백의 풀잎을, 덕유의 이슬을 느낄 기회를 주고 싶다. 타자를 통해 우회적으로 돌아서 다가가는 방법. 그 방법이 아둔한 나에게 더 큰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해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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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왕봉에 올라 알게 되었다. 산 위에도 바다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2004 박상규
지금 지리산은 대책 없이 붉어지고 있다. 정신없이 그리고 거침없이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 절정이 극이 이르면 지리산은 낙엽을 모두 떨구고 그 몸서리 쳐지는 추위를 맨몸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럼에도 지리산은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지리산의 절정이 거룩하면서도 눈물겨운 건 그 때문이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 존재가 부담스럽지 않게 사랑하는 미덕. 절정의 끝에 지독한 힘겨움이 있더라도 거침없이 달려가는 거룩함. 얼만큼의 시간이 흘러야 나는 그 미덕과 거룩함을 배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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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이 밝아오면 우직한 반야봉도 눈을 뜬다.
ⓒ2004 박상규
짧게 하려던 말이 길어졌다. 이성부의 시로 대신하련다.

지리산을 여러 차례 오르내렸는데 그 모습 모르고만 다녔다. 이 골 저 골 이 등성이 저 등성이 많이 더투고 헤집고 돌아다녀도 그 산은 저를 보여주지 않았다. 함께 잠자며 뒹굴며 살 섞어 땀흘려보아도 거듭 알 수 없었다. 어느 해 겨울 기진맥진 청학이골 내려와서 강 건너 남쪽 보았더니 크낙한 산줄기 또 하나 무겁게 버티고 있었다. 이듬해 겨울 한달음에 그 남쪽 산 올랐더니 비로소 옆으로 누운 지리산 긴 몸둥어리 한꺼번에 보이더라. 빛나는 큰 보석 병풍 펼쳐져서 내 그리움 달려가 북받치게 하더라. 사랑하는 것들 떨어져 바라보아야 더 잘 보이느니.
-이성부, <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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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은 가을의 절정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간다. 그 절정의 끝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달려간다.
ⓒ2004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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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새 쑥부쟁이는 시들고 구름은 산 사이로 요동치고 있다. 곧 저 쑥부쟁이 위로 흰눈이 수북이 쌓일 것이다.
ⓒ2004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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