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독도문제에 관하여 글 올립니다;ㅋ 정보
기타 요즘 독도문제에 관하여 글 올립니다;ㅋ본문
저는 어렸을때부터 지금까지 독도가 한국땅이라고
배워 왔고 쭉~~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독도에 대한 안좋은 추억? 이랄까;
전혀 다른 이야기가 있더라구요;;
독도는 원래 일본땅이며, 한국이 그냥 살다가 정착된땅이라는;;
그리고 몇년 더 뻐겨야 한국땅이 된다는 무슨 이상한 소리가 나돌고 있더군요;;
대체 독도는 어느나라 땅입니까?;
정말 일본에서 뻥치는 건지;; 아니면, 한국이 정말로 그랬던 거구
모르는 척 했던것인지.;; 궁금합니다.;;
배워 왔고 쭉~~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독도에 대한 안좋은 추억? 이랄까;
전혀 다른 이야기가 있더라구요;;
독도는 원래 일본땅이며, 한국이 그냥 살다가 정착된땅이라는;;
그리고 몇년 더 뻐겨야 한국땅이 된다는 무슨 이상한 소리가 나돌고 있더군요;;
대체 독도는 어느나라 땅입니까?;
정말 일본에서 뻥치는 건지;; 아니면, 한국이 정말로 그랬던 거구
모르는 척 했던것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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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con_018
좋은 사람님이 저를 또 로그인하게 만드는군요.
^^
아래 자료를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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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ulleung.go.kr/Ullung_County/dokdo/dokdo02.html
독도가 울릉도와 함께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권에 편입되기 시작한 것은 현재 기록상 512년(신라 지증왕 13) 하슬라주(溟州) 군주(軍主) 이사부(異斯夫)의 우산국(于山國) 정벌부터라 추정되고 있다.
울릉도와 독도 및 주변해역을 무대로 해상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우산국이 신라에 정복된 후 신라가 우산국에 지속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현재 울릉도에서 출토되고 있는 유적·유물들은 우산국이 신라에 정복되기 이전에 이미 상당한 문화수준에 도달해 있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정복이후 한도 본토 문화의 보다 활발한 유입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통일신라시대 금동불상은 본토의 찬란했던 불교문화가 유입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울릉도·독도 등 해양도서민들과 본토민들의 활발한 왕래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울릉도와 독도 등 동해안 일대의 도서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해상세력 우산국이 신라에 정복된 후,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도서로서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권에 편입되어, 우리의 고유영토로 존재해 왔던 것이다.
http://www.idokdo.or.kr/kor/html/story_history.html
독도의 내력은 일찍부터 기록에 오르내린 울릉도와 관련지어 살펴보아야 한다.본토 유민들에 의해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울릉도의 우산국이 신라에 귀속된 것은 6세기 초 (512) 후였다. 이 사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13(512)년에 "6월에 우산국이 신라에 속했다"는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이후 울릉도라는 명칭이 정착됨에 따라 그 부속 도서인 독도로 우산이라는 명칭이 이동하게 되었다. 조선 1432년 (세종 14)에 편찬된 지리지 강원도 울진현조에서도 "우산, 무릉 두 섬이 (울진)현 정동(正東) 바다 한가운데 있다"하여 동해 상에 무릉과 우산의 두 섬이 있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하였다. 1531년 (중종 26)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원도 울진현조에 "우산도, 울릉도 가 현의 정동 바다 한가운데 있다"하여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을 잇고 있다.
1694년 삼척청사 장한상이 울릉도의 300여리 근처에 울릉도의 3분의 1 크기의 섬을 발견한 기록을 담은 <장한상 울릉도사적기>를 펴냈다. 이것은 한국 문헌에 나오는 울릉과 우산(독도) 의 지명은 모두 울릉도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일본의 주장에 대해 울릉도와 그 부근에 있던 독도를 우리가 17세기에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생히 입증하는 것이다. 18세기 에 나온 정상익의 <동국지도>에 이르러서는 울릉도와 우산도의 위치와 크기가 정확하게 표시되었으며, 조선 후기의 지도첩에는 으레 울릉도 옆에 우산도 또는 자산도를 표기하고 있다. 일본 스스로도 독도를 한국 땅이라고 인정한 자료가 줄을 잇는다.
독도는 512년 울릉도와 함께 신라에 귀복되었으며, 고려에서는 행정 구역에 편입시키고 백성을 옮겨살게 하는 등 울릉도와 독도 경영에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내었다. 조선시대에는 독도를 '우산도', '삼봉도', '가산도', '가지도'등으로 불렀다.조선은 한때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모든 섬에 공도정책을 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울릉도와 독도 근해에 일본 어민들의 출어가 잦아지자, 안용복은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땅임을 확인 받고 일본 어부의 어로 활동을 금지토록 하였다.1667년 일본인이 편찬한 <은주시현합기>, 1869년 일본 외무성 고관들이 편찬한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 1876년 일본 내무성에서 만든 <태정宮> 결정서, 1876년 일본 해군성이 작성한 <朝鮮東海 岸圖>, 1905년 동경박물관에서 펴낸 <일본전쟁실기>, 1936년 일본육군참모본부에서 나온 <지도구역일람도> 등의 자료 등에서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밝혔다.기인 1899년(광무 3년)에 당시 중등과정 신식교육기관에서 활용됐던 <대한지지> 제 1권에 삽입 돼 있는 지도 대한전도에는 울릉도 옆에 '于山'이라는 표기와 함께 섬이 그려져 있으며 좌 측 상단에는 '光武 3년 12월 15일 學部 편집국 刊'이라는 표시가 선명히 적혀져 있다.
강원도 울진현에 속해 있던 독도를 1900년 고종황제의 칙령 41조에 의해 독도를 울릉군의 한 부속도서로서 공식적으로 강원도에 편입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일본이 독도를 1905년 시마네현에 편입시켰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5년 앞선 것으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사실을 뒤엎을 수 있는 귀중한 발견으로 평가된다.'독도'라는 이름은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에 의해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경상 북도에 편입되었고, 2000년 4월 7일을 기점으로 행정구역상 주소를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리 산1~산37로 정하였다.
http://user.chol.com/~zstokdo/history.htm
왜 독도에만 관심을 가지는가?
울릉도가 있었기 때문에 독도가 존재할 수 있었다. 울릉도가 빠진 독도연구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독도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울릉도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특히 일본의 독도연구중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울릉도와 독도 분리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독도 역사를 바라보기에 앞서서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는 근거중의 하나가 근세 이후 울릉도를 가지고 싸웠는데 독도는 울릉도의 동쪽에 있으므로, 즉 영토분쟁의 경계선이 울릉도라면 독도는 자연히 일본영토라는 것이다. 이처럼 일본은 <울릉도 독도분리정책>에 역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독도의 대표적 옛명칭인 우산도는 울릉도를 지칭하는 다른 명칭이라고 주장하며, 한섬에 두개의 이름을 붙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우리측은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도서>임을 증명하는데 연구의 촛점을 맞추고 있으며, 앞으로의 방향도 <울릉도의 부속도서로서 독도의 지위를 강화해>가는데 역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이점을 주의하면서 독도의 역사를 이해해 나가자.
언제부터 독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가?
현재까지 진행된 연구는 일시적인 체류를 제외하고 본격적으로 독도에 사람이 정착하게 된것은 1953년 독도의용수비대 체류 이후이다. 그러므로 '독도가 언제부터 우리의 생활권이었는가' 하는 점이 의미있는 질문일것이며, 그래서 맑은 날 독도가 보이는, 거리상 가장 가까운 울릉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것이다.
512년, 신라의 우산국 복속
신용하 교수는 "독도가 한국의 고유영토가 된것은 삼국시대인 512년에 신라에 의해 '우산국'이 복속된 이후 라고 언급(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13년조)"하고 있다. 즉, 이때의 우산국은 울릉도 뿐만 아니라 독도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 대표적인 증거로 '만기요람'(1808) 군정편의 "여지지에 이르기를 울릉도와 우산도는 모두 우산국의 땅"을 들고 있다.하지만, 삼국사기만으로는 언급된 우산국이 울릉도만을 일컫는 것인지, 아니면 그 부속도서로서 독도까지도 포함하는지 확인할 수 없다.
참고로, 현재까지 연구로는 '독도'라는 명칭이 기록상에 처음 보이는 것은 일본해군의 보고서인 <군함신고행동일지>의 1904년 9월 25일자에 "리앙쿠르암을 한인들은 독도라고 쓰고"에서이며, 독도의 옛명칭인 '우산도'는 태종실록 태종17년(1417)조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잊혀진 해상왕국, 우산국
그러면 '독도의 직접적인 생활권인 울릉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을까? 기록상으로는 위의 삼국사기가 최초의 기록이지만, 이러한 기록외에도 현재 남아있는 울릉도의 유적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우산국의 기원을 속시원히 설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가 '고인돌'이다(북면 현포리, 서면 남서리, 저동 등 3군데서 발견됨). 이 고인돌은 청동기 후기인, 기원전300년~ 기원전 1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고인돌은 지배자의 힘의 상징으로 선사시대 울릉도에 있었던 공동체 집단의 존재와 기원전에 시작된 우산국 역사를 증명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곡식을 갈아먹는 청동기시대 유물인 갈돌과 갈판이 발굴되었으며, 북면 천부리에서 발굴된 다량의 토기 파편을 분석결과, 화산암 토양이 검출되었으며 제작시기는 청동기시대로 밝혀졌다. 이러한 사실들은 기원전 울릉도에 공동체 집단이 존재했음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
또한 울산 울주군 반구대 암각화에 그려진 배그림(20명까지 탈수 있는 고래를 잡는 선박으로, 이 그림은 선사시대 항해술 및 조선술의 발달정도를 보여준다)과 동해의 해류상황(남쪽에서는 대마난류에서 분기한 동한난류가 한반도 남동연안에서 출발하여 울릉도 주변해역으로 흐르는 점과 함경도 연안해역을 따라 남하하는 북한한류가 울릉도 주변해역까지 흐르는 점)으로 추정한 고대의 해상루트는 선사시대 우산국에 거주한 정착민의 유래와 당시의 해상활동을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512년 신라의 우산국 정벌이후, 해상왕국 우산국의 존재는 역사속에 잊혀져왔다. 역사기록은 신라가 우산국을 정복할때 8년의 준비와 목우사자 라는 신무기까지 동원함을 보여준다. 왜? 신라가 우산국 정복을 애써 갈망했으며, 또한 우산국 정복이후 울릉도에서 출토된 6세기 이후의 유물들(금동관, 방울장신구 등)이 보여주는 울릉도의 정치.경제.문화적 수준 등에 대한 앞으로의 자세한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독도가 언제부터 한민족의 생활권이었는가 하는 점은 결국 울릉도의 역사를 밝히는 것이며, 거기에서 <울릉도의 부속도서로서 독도의 존재>가 부각될 것임이 분명하다.
참고
- 독도와 대마도, 지성의 샘, 1996, 한일관계사연구회
- 울릉문화 3집, 1998, 울릉문화원
- 문화일보 1997년 12월 22일자 5면, 호리 가즈오 일본교토대교수 인터뷰 기사
- 독도의 민족영토사 연구, 신용하, 1996
- 포항MBC 창사29주년 특집다큐멘터리 '우산국' http://www.phmbc.co.kr/Docu/usanguk.htm
- 울산 반구대 암각화 관련 : 변광현님 홈페이지 http://myhome.shinbiro.com/~kbyon/petro/kbankuda.htm
^^
아래 자료를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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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ulleung.go.kr/Ullung_County/dokdo/dokdo02.html
독도가 울릉도와 함께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권에 편입되기 시작한 것은 현재 기록상 512년(신라 지증왕 13) 하슬라주(溟州) 군주(軍主) 이사부(異斯夫)의 우산국(于山國) 정벌부터라 추정되고 있다.
울릉도와 독도 및 주변해역을 무대로 해상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우산국이 신라에 정복된 후 신라가 우산국에 지속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현재 울릉도에서 출토되고 있는 유적·유물들은 우산국이 신라에 정복되기 이전에 이미 상당한 문화수준에 도달해 있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정복이후 한도 본토 문화의 보다 활발한 유입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통일신라시대 금동불상은 본토의 찬란했던 불교문화가 유입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울릉도·독도 등 해양도서민들과 본토민들의 활발한 왕래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울릉도와 독도 등 동해안 일대의 도서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해상세력 우산국이 신라에 정복된 후,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도서로서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권에 편입되어, 우리의 고유영토로 존재해 왔던 것이다.
http://www.idokdo.or.kr/kor/html/story_history.html
독도의 내력은 일찍부터 기록에 오르내린 울릉도와 관련지어 살펴보아야 한다.본토 유민들에 의해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울릉도의 우산국이 신라에 귀속된 것은 6세기 초 (512) 후였다. 이 사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13(512)년에 "6월에 우산국이 신라에 속했다"는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이후 울릉도라는 명칭이 정착됨에 따라 그 부속 도서인 독도로 우산이라는 명칭이 이동하게 되었다. 조선 1432년 (세종 14)에 편찬된 지리지 강원도 울진현조에서도 "우산, 무릉 두 섬이 (울진)현 정동(正東) 바다 한가운데 있다"하여 동해 상에 무릉과 우산의 두 섬이 있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하였다. 1531년 (중종 26)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원도 울진현조에 "우산도, 울릉도 가 현의 정동 바다 한가운데 있다"하여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을 잇고 있다.
1694년 삼척청사 장한상이 울릉도의 300여리 근처에 울릉도의 3분의 1 크기의 섬을 발견한 기록을 담은 <장한상 울릉도사적기>를 펴냈다. 이것은 한국 문헌에 나오는 울릉과 우산(독도) 의 지명은 모두 울릉도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일본의 주장에 대해 울릉도와 그 부근에 있던 독도를 우리가 17세기에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생히 입증하는 것이다. 18세기 에 나온 정상익의 <동국지도>에 이르러서는 울릉도와 우산도의 위치와 크기가 정확하게 표시되었으며, 조선 후기의 지도첩에는 으레 울릉도 옆에 우산도 또는 자산도를 표기하고 있다. 일본 스스로도 독도를 한국 땅이라고 인정한 자료가 줄을 잇는다.
독도는 512년 울릉도와 함께 신라에 귀복되었으며, 고려에서는 행정 구역에 편입시키고 백성을 옮겨살게 하는 등 울릉도와 독도 경영에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내었다. 조선시대에는 독도를 '우산도', '삼봉도', '가산도', '가지도'등으로 불렀다.조선은 한때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모든 섬에 공도정책을 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울릉도와 독도 근해에 일본 어민들의 출어가 잦아지자, 안용복은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땅임을 확인 받고 일본 어부의 어로 활동을 금지토록 하였다.1667년 일본인이 편찬한 <은주시현합기>, 1869년 일본 외무성 고관들이 편찬한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 1876년 일본 내무성에서 만든 <태정宮> 결정서, 1876년 일본 해군성이 작성한 <朝鮮東海 岸圖>, 1905년 동경박물관에서 펴낸 <일본전쟁실기>, 1936년 일본육군참모본부에서 나온 <지도구역일람도> 등의 자료 등에서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밝혔다.기인 1899년(광무 3년)에 당시 중등과정 신식교육기관에서 활용됐던 <대한지지> 제 1권에 삽입 돼 있는 지도 대한전도에는 울릉도 옆에 '于山'이라는 표기와 함께 섬이 그려져 있으며 좌 측 상단에는 '光武 3년 12월 15일 學部 편집국 刊'이라는 표시가 선명히 적혀져 있다.
강원도 울진현에 속해 있던 독도를 1900년 고종황제의 칙령 41조에 의해 독도를 울릉군의 한 부속도서로서 공식적으로 강원도에 편입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일본이 독도를 1905년 시마네현에 편입시켰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5년 앞선 것으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사실을 뒤엎을 수 있는 귀중한 발견으로 평가된다.'독도'라는 이름은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에 의해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경상 북도에 편입되었고, 2000년 4월 7일을 기점으로 행정구역상 주소를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리 산1~산37로 정하였다.
http://user.chol.com/~zstokdo/history.htm
왜 독도에만 관심을 가지는가?
울릉도가 있었기 때문에 독도가 존재할 수 있었다. 울릉도가 빠진 독도연구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독도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울릉도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특히 일본의 독도연구중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울릉도와 독도 분리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독도 역사를 바라보기에 앞서서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는 근거중의 하나가 근세 이후 울릉도를 가지고 싸웠는데 독도는 울릉도의 동쪽에 있으므로, 즉 영토분쟁의 경계선이 울릉도라면 독도는 자연히 일본영토라는 것이다. 이처럼 일본은 <울릉도 독도분리정책>에 역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독도의 대표적 옛명칭인 우산도는 울릉도를 지칭하는 다른 명칭이라고 주장하며, 한섬에 두개의 이름을 붙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우리측은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도서>임을 증명하는데 연구의 촛점을 맞추고 있으며, 앞으로의 방향도 <울릉도의 부속도서로서 독도의 지위를 강화해>가는데 역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이점을 주의하면서 독도의 역사를 이해해 나가자.
언제부터 독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가?
현재까지 진행된 연구는 일시적인 체류를 제외하고 본격적으로 독도에 사람이 정착하게 된것은 1953년 독도의용수비대 체류 이후이다. 그러므로 '독도가 언제부터 우리의 생활권이었는가' 하는 점이 의미있는 질문일것이며, 그래서 맑은 날 독도가 보이는, 거리상 가장 가까운 울릉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것이다.
512년, 신라의 우산국 복속
신용하 교수는 "독도가 한국의 고유영토가 된것은 삼국시대인 512년에 신라에 의해 '우산국'이 복속된 이후 라고 언급(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13년조)"하고 있다. 즉, 이때의 우산국은 울릉도 뿐만 아니라 독도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 대표적인 증거로 '만기요람'(1808) 군정편의 "여지지에 이르기를 울릉도와 우산도는 모두 우산국의 땅"을 들고 있다.하지만, 삼국사기만으로는 언급된 우산국이 울릉도만을 일컫는 것인지, 아니면 그 부속도서로서 독도까지도 포함하는지 확인할 수 없다.
참고로, 현재까지 연구로는 '독도'라는 명칭이 기록상에 처음 보이는 것은 일본해군의 보고서인 <군함신고행동일지>의 1904년 9월 25일자에 "리앙쿠르암을 한인들은 독도라고 쓰고"에서이며, 독도의 옛명칭인 '우산도'는 태종실록 태종17년(1417)조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잊혀진 해상왕국, 우산국
그러면 '독도의 직접적인 생활권인 울릉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을까? 기록상으로는 위의 삼국사기가 최초의 기록이지만, 이러한 기록외에도 현재 남아있는 울릉도의 유적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우산국의 기원을 속시원히 설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가 '고인돌'이다(북면 현포리, 서면 남서리, 저동 등 3군데서 발견됨). 이 고인돌은 청동기 후기인, 기원전300년~ 기원전 1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고인돌은 지배자의 힘의 상징으로 선사시대 울릉도에 있었던 공동체 집단의 존재와 기원전에 시작된 우산국 역사를 증명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곡식을 갈아먹는 청동기시대 유물인 갈돌과 갈판이 발굴되었으며, 북면 천부리에서 발굴된 다량의 토기 파편을 분석결과, 화산암 토양이 검출되었으며 제작시기는 청동기시대로 밝혀졌다. 이러한 사실들은 기원전 울릉도에 공동체 집단이 존재했음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
또한 울산 울주군 반구대 암각화에 그려진 배그림(20명까지 탈수 있는 고래를 잡는 선박으로, 이 그림은 선사시대 항해술 및 조선술의 발달정도를 보여준다)과 동해의 해류상황(남쪽에서는 대마난류에서 분기한 동한난류가 한반도 남동연안에서 출발하여 울릉도 주변해역으로 흐르는 점과 함경도 연안해역을 따라 남하하는 북한한류가 울릉도 주변해역까지 흐르는 점)으로 추정한 고대의 해상루트는 선사시대 우산국에 거주한 정착민의 유래와 당시의 해상활동을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512년 신라의 우산국 정벌이후, 해상왕국 우산국의 존재는 역사속에 잊혀져왔다. 역사기록은 신라가 우산국을 정복할때 8년의 준비와 목우사자 라는 신무기까지 동원함을 보여준다. 왜? 신라가 우산국 정복을 애써 갈망했으며, 또한 우산국 정복이후 울릉도에서 출토된 6세기 이후의 유물들(금동관, 방울장신구 등)이 보여주는 울릉도의 정치.경제.문화적 수준 등에 대한 앞으로의 자세한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독도가 언제부터 한민족의 생활권이었는가 하는 점은 결국 울릉도의 역사를 밝히는 것이며, 거기에서 <울릉도의 부속도서로서 독도의 존재>가 부각될 것임이 분명하다.
참고
- 독도와 대마도, 지성의 샘, 1996, 한일관계사연구회
- 울릉문화 3집, 1998, 울릉문화원
- 문화일보 1997년 12월 22일자 5면, 호리 가즈오 일본교토대교수 인터뷰 기사
- 독도의 민족영토사 연구, 신용하, 1996
- 포항MBC 창사29주년 특집다큐멘터리 '우산국' http://www.phmbc.co.kr/Docu/usanguk.htm
- 울산 반구대 암각화 관련 : 변광현님 홈페이지 http://myhome.shinbiro.com/~kbyon/petro/kbankuda.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