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하지않고 지배당하는 것보다 더 치욕적인 것은 없다 정보
저항하지않고 지배당하는 것보다 더 치욕적인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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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친의 글을 무단으로 가져왔습니다.
'바람구두연방'의 주인...
1943년 2월 18일. 햇살이 화창한 목요일 아침이었습니다, 뮌헨대학의 모든 강의실과 복도에 유인물이 살포되기 시작했습니다. 한스 숄(Hans Scholl)과 소피 숄(Sophie Scholl)은 대담하게 강의실 지붕에 올라가 유인물을 살포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몇 차례에 걸쳐 거리와 대학에서 반나치 유인물과 히틀러를 모욕하는 낙서를 비밀리에 표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들이 살포하는 유인물이 바람을 타고 눈송이처럼 떨어졌고, 나치의 지방당원인 학교 급사가 유인물을 발견하자마자 그들이 올라가 있는 건물의 모든 출입구를 잠그고 게슈타포(비밀경찰)에 신고했습니다.
몇 분 뒤 게슈타포가 도착하여 그들을 체포했고, 그들은 대학에서 1.6km가량 떨어진 비텔스바흐 궁내의 게슈타포 본부로 끌려갔다. 게슈타포는 관련자들의 명단을 확보하기 위해 한스의 방을 수색했고, 인스부르크에서 세 아이의 아버지인 크리스토프 프롭스트(Christoph Probst)가 보내온 편지를 발견하여 그마저 체포했습니다. 4일간의 가혹한 고문과 심문이 끝나자, 그들 세 명의 대학생은 2월 22일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나치는 숄 남매와 프롭스트를 본보기로 내세워 더 이상 정부에 대한 비판할 용기를 발휘하는 어리석은 시민들이 없기를 바랐습니다. 그들은 공개 재판을 통해 이들을 혹독하게 몰아부쳤고, 나치 정권의 '교수형 재판관'이란 별명으로 불리우는 롤란트 프라이슬러(Roland Freisler, 1893-1945)가 재판을 주관했습니다. 진홍색 법의를 걸친 프라이슬러는 친위대와 비밀경찰, 그리고 이들에게 적대적인 시민들이 들어찬 법정에서 세 명의 어린 대학생들을 가혹하게 몰아부쳤습니다.
이들에게는 <조국에 대한 반역죄와 군대의 전복 및 군수산업의 파괴를 선동한 예비 대역죄>라는 죄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프라이슬러는 혼자서 열렬한 어조로 지껄인 후 조용히 그러나 꼿꼿한 자세로 앉아있는 피고인들에게 외쳤다. "훌륭한 독일인이라면 어떻게 고소장에 쓰여진 것과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었는지 알고 싶다."고 외쳤습니다.
지난 23일 테러방지법이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으로 국회에 법안이 상정되자 김광진 의원을 시작으로 더불어민주당 소속 108명 의원 전원의 명의로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한스 쇼과 소피 숄 남매가 나치에 의해 처형당한 바로 다음날이었죠. 저는 지금도 해마다 2월이 오면 '백장미단'을 떠올리곤 합니다. 한스와 소피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뒤 살아남은 누이 잉게 숄은 그들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사람이 현존하는 바벨탑에 약간의 흠을 내는 최소한의 일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를 한다는 것도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고교 시절에 읽고 지금껏 가슴에 새겨놓은 글귀 중 하나입니다. 숄 남매가 나치와 히틀러에 저항하다가 희생당했지만, 독일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독일은 마지막 벽돌 한 장까지 모두 부숴진 뒤에야 전쟁기계의 작동을 멈출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희생은 무의미한 것이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한스 숄이 뿌린 전단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무책임한 어둠의 충동에 빠진 통치자에게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지배’당하는 것보다 더 치욕적인 일은 없습니다.”
숄 남매의 죽음으로 독일이란 나라가 당장에 뒤바뀌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저항마저 없었더라면 독일이란 나라는 어둠의 충동에 빠진 통치자에게 아무 저항도, 누구도 항거하지 못한 나라로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민주당의 필리버스터는 무용할 수도 있고, 무의미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지적이나 비판 또한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멈출 것이 아니라 앞으로 더 나은 투쟁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필리버스터 역시 필요한 싸움입니다. 왜냐면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제 기대와 달리 더 무기력하고, 더 비참하게 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민주당을 위해 필리버스터를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자유를 위해 이 싸움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데도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방어할 힘도 없는 가엾은 사람을 뭉개버리는 인간들은 누구든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선량하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그저 단순하게 선량하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다 아우른다. 이것은 어떤 지성보다도, 옳다고 주장하는 우쭐함보다도 더 우월한 것이다.”
자유 만세!
'바람구두연방'의 주인...
1943년 2월 18일. 햇살이 화창한 목요일 아침이었습니다, 뮌헨대학의 모든 강의실과 복도에 유인물이 살포되기 시작했습니다. 한스 숄(Hans Scholl)과 소피 숄(Sophie Scholl)은 대담하게 강의실 지붕에 올라가 유인물을 살포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몇 차례에 걸쳐 거리와 대학에서 반나치 유인물과 히틀러를 모욕하는 낙서를 비밀리에 표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들이 살포하는 유인물이 바람을 타고 눈송이처럼 떨어졌고, 나치의 지방당원인 학교 급사가 유인물을 발견하자마자 그들이 올라가 있는 건물의 모든 출입구를 잠그고 게슈타포(비밀경찰)에 신고했습니다.
몇 분 뒤 게슈타포가 도착하여 그들을 체포했고, 그들은 대학에서 1.6km가량 떨어진 비텔스바흐 궁내의 게슈타포 본부로 끌려갔다. 게슈타포는 관련자들의 명단을 확보하기 위해 한스의 방을 수색했고, 인스부르크에서 세 아이의 아버지인 크리스토프 프롭스트(Christoph Probst)가 보내온 편지를 발견하여 그마저 체포했습니다. 4일간의 가혹한 고문과 심문이 끝나자, 그들 세 명의 대학생은 2월 22일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나치는 숄 남매와 프롭스트를 본보기로 내세워 더 이상 정부에 대한 비판할 용기를 발휘하는 어리석은 시민들이 없기를 바랐습니다. 그들은 공개 재판을 통해 이들을 혹독하게 몰아부쳤고, 나치 정권의 '교수형 재판관'이란 별명으로 불리우는 롤란트 프라이슬러(Roland Freisler, 1893-1945)가 재판을 주관했습니다. 진홍색 법의를 걸친 프라이슬러는 친위대와 비밀경찰, 그리고 이들에게 적대적인 시민들이 들어찬 법정에서 세 명의 어린 대학생들을 가혹하게 몰아부쳤습니다.
이들에게는 <조국에 대한 반역죄와 군대의 전복 및 군수산업의 파괴를 선동한 예비 대역죄>라는 죄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프라이슬러는 혼자서 열렬한 어조로 지껄인 후 조용히 그러나 꼿꼿한 자세로 앉아있는 피고인들에게 외쳤다. "훌륭한 독일인이라면 어떻게 고소장에 쓰여진 것과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었는지 알고 싶다."고 외쳤습니다.
지난 23일 테러방지법이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으로 국회에 법안이 상정되자 김광진 의원을 시작으로 더불어민주당 소속 108명 의원 전원의 명의로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한스 쇼과 소피 숄 남매가 나치에 의해 처형당한 바로 다음날이었죠. 저는 지금도 해마다 2월이 오면 '백장미단'을 떠올리곤 합니다. 한스와 소피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뒤 살아남은 누이 잉게 숄은 그들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사람이 현존하는 바벨탑에 약간의 흠을 내는 최소한의 일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를 한다는 것도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고교 시절에 읽고 지금껏 가슴에 새겨놓은 글귀 중 하나입니다. 숄 남매가 나치와 히틀러에 저항하다가 희생당했지만, 독일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독일은 마지막 벽돌 한 장까지 모두 부숴진 뒤에야 전쟁기계의 작동을 멈출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희생은 무의미한 것이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한스 숄이 뿌린 전단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무책임한 어둠의 충동에 빠진 통치자에게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지배’당하는 것보다 더 치욕적인 일은 없습니다.”
숄 남매의 죽음으로 독일이란 나라가 당장에 뒤바뀌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저항마저 없었더라면 독일이란 나라는 어둠의 충동에 빠진 통치자에게 아무 저항도, 누구도 항거하지 못한 나라로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민주당의 필리버스터는 무용할 수도 있고, 무의미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지적이나 비판 또한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멈출 것이 아니라 앞으로 더 나은 투쟁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필리버스터 역시 필요한 싸움입니다. 왜냐면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제 기대와 달리 더 무기력하고, 더 비참하게 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민주당을 위해 필리버스터를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자유를 위해 이 싸움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데도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방어할 힘도 없는 가엾은 사람을 뭉개버리는 인간들은 누구든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선량하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그저 단순하게 선량하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다 아우른다. 이것은 어떤 지성보다도, 옳다고 주장하는 우쭐함보다도 더 우월한 것이다.”
자유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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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가 짧아서,,,죄송스럽다능,,
코드가 짧아서,,,죄송스럽다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