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목사 한경직이 설립한 "서북청년단(회)" > 정치/경제/사회

정치/경제/사회

가장 마지막에 업데이트 된 댓글의 글 부터 노출됩니다.

원로목사 한경직이 설립한 "서북청년단(회)" 정보

원로목사 한경직이 설립한 "서북청년단(회)"

본문

영락교회와 원로목사 한경직

서울 중구 한 복판에 있는 명동성당의 맞은편에 자리한 영락교회 그리고 그곳의 한경직(1903-2000)원로목사는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있는 목사입니다.

 

그는 평안남도 출신으로, 1945년 남한으로 이주, 현재의 영락교회 부지에 있던 일본 천리교 경성분소 신전을 인수, 개조하여, "벧아니(베다니) 전도교회"라는 교회를 설립했고, 다음해인 1946년 11월 영락교회로 개명 1949년 담임목사로 부임합니다.

 

평양 숭실대(숭전대, 현 숭실대-1987)이과(당시 이승훈, 조만식의 제자이기도 함.) 졸업후, 미국행 엠포리아 대학에서 인문과학을 전공, 프린스턴 대학 신학교에서 신학전공, 프린스턴 졸업과 동시 결핵으로 투병생활. 이후 조만식의 추천으로 평양숭인상업학교 교사생활 동시에 숭실대학 강사 출강. 평양 숭실대는 1938년 일본의 신사참배를 반대해 일제가 평양숭실대가 폐교 시킴, 1954년 서울에서 숭전대로 재건, 1987년 숭실대로 교명 개편.

 

그의 이력이나 학력은 그쯤에서 정리하기로 하고, 그의 80년대 초 인터뷰를 보자면...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는 물론이고, 그가 조직한 서북청년회는 경찰도 아니고, 그렇다고 군인은 더더욱 아니었음에도 한경직목사는 그들이 제주 4,3사건을 평정했다고 합니다.

 

 

서북 청년단의 실체와 그들의 활약

서북청년(단)회는 1946년말 종로 YMCA에서 결성 됩니다.

그들은 사회주의 소군정이 들어선 북한에서 친일부역자로 밝혀지거나, 지주들, 기독교인들... 이른바 반동분자로 찍혀 탄압받았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생존하기 어려워 월남한 서북지역 출신들이 주를 이뤘다고 합니다. 황해도 이북과 평안·함경도 지역 출신들이 각기 활동하다 더 강한 세력이 되고자 기존 조직을 해체·통합한 것이라고 하는데, 나중에 밝혀지길 부자들 보다는, 친일 부역자 와 기독교인들이 주 세력들이었다고 합니다.

 

 서북청년들의 ‘활약상’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이 1946년 대구봉기(10월항쟁)와 1948~54년 제주4·3항쟁의 진압이었으며, 서청에 대한 기존 연구는 2000년대 초까지 민간인 학살의 주역으로, 그 잔혹한 폭력의 동기에 대한 조사와 분석이 주로 이뤄졌습니다. 

 

서청은 해방공간과 한국전쟁기 목숨 걸고 이른바 ‘좌익 척결’의 선봉에 섭니다. 미군정의 국립대학설립안에 수많은 교수·학생이 반대운동을 벌이자 서청은 그 핵심을 좌파라 단정짓고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6000여명의 회원을 경성대학을 비롯한 각 학교에 편입학시켰”으며, 경성방직·동양방직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파괴에 전위로 나선 것도 서청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은 서북 개신교인들에게 기회의 공간으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역시 그 중심엔 한경직이 있었습니다. 그는 남한 개신교 장로회에서 신사참배 거부그룹과 조선신학원그룹을 밀어내고 주도권을 잡았고. 그 힘은 “미국에서 들어오던 방대한 전쟁 구호물자와 선교자금의 독점”에 있었습니다. 서북 출신인 그는 전쟁 전 서북지역을 관할했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과의 밀착 관계를 활용했으며.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 통역을 전담할 수 있었던 덕이기도 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우리 교회 청년들이 열렬한 반공 청년들이라 (기독교민주동맹 창립총회에) 가서 쳐부수고 해산시켰거든. 지금은 그 청년들이 다 장로 됐수다”라며, 영락교회 청년들이 반탁·반공 운동에 앞장섰다고 말하기도 합니다.(테러를 반공 운동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요즘 태극기 부대 수준...) 

 

 

서북청년단의 부활과 5.16쿠데타

 이승만 정권기 한때 정치적으로 배제됐던 서북 출신들은 5·16쿠데타와 함께 화려하게 부활합니다. 서청 회원들은 한국전쟁기 조선경비대(국군)와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에 대거 들어갔으며,  47년 입교한 육사 5기생 중 서북 출신이 3분의2였고, 48년 입교한 8기에도 서북 출신이 많았습니다. 5기와 8기의 서북 출신 장성들은 “1961년 군사 정변의 주역”입니다.(5.16 쿠데타)

 

현재 5.16을 혁명이라고 부르는 군장성, 국방부 장관 후보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겠지요.

(헌법상, 5.16은 쿠데타라고 결정되었음에도.... 3권 분립 무시, 헌법 무시)

 

 

 

80년대 말 어떤 유행어.

 1989년 6월 한 신문 기사는 흥미로운 유행어를 소개했습니다.

비행기를 타려면 티케이(TK) 노스웨스트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을 타라.

 

기사엔  그 말의 배경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요직을 과점한 대구·경북 세에다 국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신원로 그룹들 상당수가 이북 출신들(국회의장·국무총리·대통령비서실장)임을 빗댄 것으로, 노스웨스트는 과거 서북청년단에서 유래한다.”

 

 오늘날 대형교회의 상당수가 서북 개신교인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의 성장과 영향력 확대는 한국 사회를 더 오른쪽으로 이동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이명박 정부에서도 소망교회란 이름으로 재등장했으며. 소망교회는 서북 출신 목사 곽선희가 세운 교회였습니다.

 

 

 

 

한국교회의 비리와 세습, 성추행등...

 교회의 확장과 난립, 무리한 선교활동 그리고 90년대 이후 대형 교회들의 비리와 세습, 목사들의 성추행 등 사회적 범죄 행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됐던 한국 보수개신교는 서북청년회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살아남아 성장해 정치·경제·사회문화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좀비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승만이 장기집권을 위해 정적을 제거하는데 필요했던 존재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북한에서 도망친 기독교 세력들이 이승만과 박정희 그리고 사자방(이명박 정부의 4대 오점)으로 나라경제를 거들 낸 이명박의 소망교회까지 뿌리는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친일세력=유신세력=광주학살=자유한국당이 공생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분단과 반공이 있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정치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영화 "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2" (지슬은 감자를 뜻하는 제주도 방언)

영화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2>을 본 사람들은 제주 4·3항쟁의 참상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전쟁의 축소판이었던 제주 4·3항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4·19혁명으로 쫓겨난 이승만을 국부로 추모하고, 유신정권의 박정희와 무고한 광주시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전두환을 못 잊어 "전사모"라는 카페까지 성행하곤 했습니다. 

 

 공휴일이 되면 광화문을 비롯한 도시 곳곳에서 나랏돈을 도적질한 현행범을 살려내기 위해 악을 쓰는 무리들이 누굴까요?

국정을 농단하다 ‘징역 30년’에 벌금 1185억으로 재판, 수감되었다가 얼마전 풀려난 박근혜가 억울하다고 악을 쓰는 무리는 또 누굴까요?

보수라는 옷을 입고 일선 정치 선두에서 보수재건을 꿈꾸며 깃발을 들고 있는 정치인들… 이들의 든든한 기둥이 된 세력은 다름 아닌 기독교인들이 아니었는지요?

 

 

도서 - "한국전쟁과 기독교"

<한국전쟁과 기독교>는 “학살 피해의 패러다임을 넘어” 서북청년을 보는 시야를 넓히는 책입니다. 

그들 월남한 서북청년들의 뿌리를 추적하고, 그들이 신사상(기독교)을 젖줄 삼아 ‘전투적 반공주의’로 무장한 채 해방 이후 한국전쟁이라는 공간과 5·16쿠데타를 발판으로 하여 어떻게 남한 사회의 주류로 발돋움했는지를 다룬 역작입니다. 

 

역사학자 윤정란(케임브리지대 한국전쟁연구사업단 연구원)이 5년여에 걸친 연구·집필로 완성했으며. 아이러니한 언사로 표현하자면 19세기 말 한반도 서북 지역에서 태동한 한 개신교 세력의 20세기 ‘성장담’이라 할 것입니다.  

 

<한국전쟁과 기독교>는 한국 개신교 주류의 뿌리를 톺은 책입니다. 

뿌리라 할 서청이 가담한 일 중에서 4·3 진압의 희생자는 수만명에 이르며.

그에 대한 정부의 사과는 있었으되 기독교(민간차원)의 사과는 아직 없습니다

 

 

한국 개신교계는 과거 서청의 이름으로 행한 일을 일각에서나마 사과해야 하는 것 아닌지요?

 

 

=====================================

 

 

위 내용은 서청 관련 일부 내용에 불과합니다.

서북청년(단)회는 의외로 거대한 세력이며,

그들의 악행, 정치테러, 민주 인사 탄압들은 그 사례가 많지만,

채 밝히지 못한 것들도 많습니다.

그들이 정리 되지 않는다면, 친일청산은 어림도 없다고 

학자들은 말하곤 합니다.

 

애초에 우리나라에 기독교와 카톨릭이 들어오게 된 것은,

그들의 주장처럼 사랑이 아닌 점령의 목적으로 들어왔기에...

(사실, 미국만 해도 원주민을 학살하고 기독교국가라고 선언했으니...

사랑과는 거리가 먼 종교임에는 틀림 없는 듯...) 

 

====================================

 

 

참고 : 천리교 (일본어: 天理教 텐리쿄)는 일본 나라현 덴리시에 본거지를 둔 신흥종교.

1838년 지역유지의 아내 나카야마 미키(中山みき)가 창시한 종교.

현재 우리나라에선 수시로 서울역앞에서 포교 활동을 하고 있음.

 

 

 

공감
4

댓글 7개

제주 4.3항쟁 초기 진압 책임자로 개신교인이었던 조병옥 경무부장,
좌익 전력자를 전향시킨다는 명목으로 만든 보도연맹 결성을 주도하는 등 평안남도 출신으로 공안검사로 유명했던 오제도 검사.
장로를 지낸 최명신과 이세호 장군 등이 모두 영락교회 줄신이라는 것...

그리고,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도 서북청년단에서 활동했었다는 것....


한국 근현대사에서, "메카시즘"의 한심한 역사를 남긴 인물들은 모두...
참고 2 : 
당시 소련의 신탁통치안은 한국인이 임시정부를 만들어 5년 동안 4개국 감독 아래 자치를 연습하고 통일정부를 구성하는 안을 제시함. 미국의 신탁통치 안은 자기가(영국, 중국은 미국편이므로) 한반도를 직접 통치하겠다는 것.

그런데 이것을 동아일보가 오보(잘못 보도)...
미국은 한국의 즉각 독립을 주장했지만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동아일보의 그 유명한 오보(誤報)가 상황을 더욱 왜곡했다.

오보에 더해 서청을 포함한 기독교가 신탁통치를 반대.

결국 남한만의 단독정부 설립, 광복후 분단이 되는 사태로 전환
(당시 종교 단체중 신탁 통치를 찬성한 것은 기독교가 유일함.)
기독교는 이미 이념적 편향에만 열중해왔음.
그레이님 때문에 아침부터 열 받습니다.
그래도 그레이님 덕분에 다시 한번 근현대사의 아픔을 상기합니다, 먼저 스트레스 받아 마음 상하는 일은 없기 바랍니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목사들에 대한 징계가 아예 없는 게, 기독교였지요.
그런 때문에 목사들의 악행은 말도 못할 정도입니다.
교리 또한 "회개하면 용서가 된다"는 것으로,
그들은 일주일에 한번 씩 죄를 리셋하며 당당히 살아오고 있습니다.
 
더욱이 목사들에 대해 징계를 하지 않는 것은
"신의 종은 신이 판단한다" 궤변이었습니다.
또다른 주장 "악마가, 사탄이 ... )하는 핑계인데.
사실 그런 주장은 바이블적으로도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욕도 아까운 존재들.. 동감입니다.
전체 1,581 |RSS
정치/경제/사회 내용 검색

회원로그인

진행중 포인트경매

  1. 참여6 회 시작24.04.25 20:23 종료24.05.02 20:23
(주)에스아이알소프트 / 대표:홍석명 / (06211) 서울특별시 강남구 역삼동 707-34 한신인터밸리24 서관 1404호 / E-Mail: admin@sir.kr
사업자등록번호: 217-81-36347 / 통신판매업신고번호:2014-서울강남-02098호 / 개인정보보호책임자:김민섭(minsup@sir.kr)
© SIRSOFT